한글과 진관사와 상사독서(上寺讀書)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를 장려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독서(사가독서)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여 절에서 독서(상사독서)하도록 했다. 1442년(세종24)에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의 학자들이 진관사에서 상사독서(上寺讀書)를 했다. 박팽년, 성삼문, 신숙주, 이개 4명은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은 집현전 학자들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 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자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는 것이 있어도 끝내 제 뜻을 능히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믈 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한글(Hangeul, 훈민정음)과 한자(漢字)
한글[(Hangeul),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다] 창제는 세종대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에서 출발하여 그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세종대왕의 자유 평등사상이 깃들어 있는 위대한 인류문화유산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사용하던 문자인 한자(漢字)는 지배계층인 양반(兩班) 사대부들이 한자(漢字)를 읽고 쓰지 못하는 백성들을 지배하는 도구로 활용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여 이를 사대부들에게 알렸으나 사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힌 세종대왕은 이를 백성들이 쉽게 익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설서를 만들 것을 신하들에게 지시하여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8명의 신하가 이를 해설한 책(훈민정음해례본)을 만들어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해례본을 지은 집현전 학자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연구하였는지 알아보는 것도 한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종대왕과 신하들의 연구 노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그 길을 찾아가 보자.
기록 자료 살펴보기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가독서제를 실시하여 책을 읽게 하여 학문을 장려하였지만 집에서 하는 독서는 가정사 때문에 글을 읽는데 방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 한다]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 절은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에 필요했던 훈민정음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8인 가운데 무려 네 명이나 되는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사가독서를 한 곳이다. <세종실록 > 세종 28년(1446) 9월 29일 자에 이달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해례본 간행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음력 9월 상순에 이루어졌다고 했다.
한글날(10월 9일)은 바로 음력 9월 상순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바꾼 날짜이다.
사가독서제도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종실록 34권, 세종 8년 12월 11일 경오 4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집현전 부교리 권채 등을 불러 집현관으로서 독서에만 전념하라고 명하다.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권채(權綵)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 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하였다.
세종은 1420년(세종 2) 3월에 집현전을 설치한 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를 선발, 휴가를 주어 독서 및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하게 했다.
사가독서제도가 최초로 실시된 것은 1426년 12월로, 세종임금은 권채(權採)ㆍ신석견(辛石堅)ㆍ남수문(南秀文) 등 3인을 선발해 관청 공무에는 관계없이 연구에만 몰두하게 했는데, 그 규범은 대제학 변계량(卞季良)의 지시를 받게 했다. 이때 독서를 한 장소는 각자의 집 이었다.
1442년에는 신숙주(申叔舟) 등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이석형, 하위지 에게 휴가를 주어 진관사(津寬寺)에서 글을 읽게 했는데, 이를 상사독서(上寺讀書)라고 한다. 그 뒤 1451년(문종 1)에는 11인이, 1453년(단종 1)에는 4인이, 세조 초기에는 14인이 상사독서의 방법으로 학문과 인격을 연마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 사건이 발생한 뒤 집현전이 폐지되고 사가독서제도가 중단되었으나, 1469년 성종이 즉위해 예문관(藝文館)을 설립하고 사가독서를 되살렸다.
1476년(성종 7)에는 채수(蔡壽) 등 6인에게 독서휴가를 주었고, 1483년에는 용산(龍山)에 있는 빈 사찰을 증축해 독서당을 만들어 사가독서제도를 활성화했다.
1504년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독서당과 사가독서를 폐지했고, 중종은 1506년 11월에 다시 되살리고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1517년에는 두모포(豆毛浦)[성동구 옥수동]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해 사가독서에 열중할 수 있게 했다. 그 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75년 동안 이 독서당은 사가독서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가독서제도는 중단되었으나 1608년(광해군 원년) 대제학 유근(柳根)의 청으로 한강별영(漢江別營)을 독서하는 처소로 삼았으며, 인조 때 병자호란이 있은 뒤 활성화되지 못한 채 영조 때까지 명맥을 이어오다 규장각 설립과 함께 폐지되었다.
사가독서제에 선발된 문신에게 주어지는 기한은 최단기인 경우 1개월에서 3개월이었으며, 최장기인 경우에는 달수를 표시하지 않고 ‘장가(長暇)’라고만 하였다.
훈민정음 어제(御製)와 예조판서 정인지의 서문에 기록된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말하기를,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마침내 상세히 해석을 가해 여러 사람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시니, 이에 신(臣)이 집현전 응교(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 강희안(姜希顔), 행집현전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ㆍ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삼가 모든 해석과 범례(凡例)를 지어 그 경개(梗槪)를 서술하여, 이를 본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이 없어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기록에 의하면,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곧 1443년에 창제를 마무리한 세종이 집현전 학사(학자 관리)인 대제학 정인지(鄭麟趾), 집현전 응교(應敎)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박팽년(朴彭年)과 신숙주(申叔舟), 수찬(修撰) 성삼문(成三問), 돈녕부(敦寧府) 주부(注簿) 강희안(姜希顔), 행집현전부수찬(行集賢殿副修撰) 이개(李塏)ㆍ이선로(李善老) 등과 더불어 해례본을 펴낸 것이다.
["조선시대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의 도입과 운영", 조사ㆍ정리: 세종국어문화원 은평구 한글사업 연구팀(2022)]
청농 문관효 한글서예가, 진관사 주지 법해스님,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진관사에 있는 한글길을 함께 걸어 봅시다
한글 창제 후 세종대왕은 한글 사용을 시험하기 위하여 석보상절(1447 훈민정음 첫 실험서), 월인천강지곡(1447 훈민정음 보급서), 월인석보(1459 훈민정음언해본은 다른 책의 앞머리에 실려 그 책을 제대로 읽기 위한 교육서) 등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주로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책들이 편찬되었음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불교서적 한글화 작업은 백성들에게 한글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불교와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는 정치적으로 사대부들에게 배척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서적이 모두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사대부들도 불교서적을 읽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불교는 일반 백성들과 함께 하였으며, 그들이 사찰에 다니는 것은 일상생활이었을 것이다.
서울특별시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에 만들어진 “진관사 한글길"을 걸으며 집현전 학자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PlusCode : JWQW+9H 서울특별시
최준화 / Junhwa Choi
LOG EDITOR / INSIGHT•LOG 대표 / IT 전문가 /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사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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